'바람불어도좋아'에 대한 글목

바람 불어도 좋아 / 김병년

2013.08.15 09:35




우리의 아픔은 신비다. 하나님의 신비 안에 거하면,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다. 신비를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인생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 p22


하나님이 가시였다. 찌르는 가시. 신앙이 성숙하려면 자신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실망해야 한다지만, 하나님이 가시가 되어 찌르는 그 아픔은 육체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하나님이 가시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삶이 혼란스러웠지만 그 사실을 알게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나님꼐 안찔려도 삶이 아프고 하나님께 찔려도 아프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래저래 아픈 삶이다. p36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에 사용한 가시로 추정되는 '아타드 가시'의 나무는 밀밭 사이에서 주로 자라며, 추수하는 농부들의 휴식처라고 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가시나무 아래서의 휴식을 상상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성한 아타드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 쉬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온다(삿 9:15) 이 얼마나 놀라운 상징인가! 찌르는 가시가 인간에게 안식을 준다. 또한 예수님의 머리를 찔러서 흐르는 피가 우리를 구원하였으니 이 가시는 죄인들에게 영생을 선물하는 가시다. 이와 같은 역설이 또 있을까.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그 가시나무가 사용되다니. 이것이 십자가다. 가시에서 꽃이 핀다. 가시에서 구원을 맺는다.p43


임마누엘은 죄인들을 죄에서 구해 내려고 오시는 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 분은 우리의 곤경을 너무도 잘 아시고, 그 곤경 속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머무신다.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사신다. 내가 웅덩이에 빠져 도움을 간구했을때, 나는 하나님이 곧장 나를 나쁜 상황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황가운데로 찾아오셔서 '함께 머무셨다'  p67


인생은 참 냉정하다. 선한 선택을 했다고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 바른 선택을 했다고 칭찬해 주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했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한다. p79


우리는 고통 자체가 없어야 하고, 하나님이 결코 변화와 고통을 경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고, 고난당하고 죽을수도 없다는 인본적인 생각의 산물일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이해는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인성을 허상으로 만들 뿐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고통받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함 가운데로 오신것이다. p160


사람들은 질병이 불안을 가져오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삶 자체가 본래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들리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고통을 품고 진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견고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은 바람에 늘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삶을 안정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버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오직 반석이신 그분을. p182







복음과 상황에 인생학교를 꾸준히 연재하시는 김병년 목사님의 두번째 책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국내 모든 사역자 중 이분만큼 필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그 이유는 머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이 몸에 글로서 새겨졌기에 몸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문장, 한문장마다 목사님이 짊어지신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환자는 다 신학자가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아플수록 오히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삶의 모든 진리와 근원에 대해 철저하게 질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 문제해결을 해주셔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그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곁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즉 약함가운데로 그분께서 친히 들어오셨듯이, 고통가운데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을 발견한다.


고통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자는 고통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문제들을 드러낸다. 고통 앞에서 직면하는 재정문제, 성적인 욕구, 이혼에 대한 갈등 등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정면돌파를 시도하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 부분이 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때로 감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를 강요받는다. 슬퍼하고 애통해할 시간이 필요하지만 해결될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는 폭력에 시달린다. 위선이다. 억지 감사이다.

종종 후배들에게 '정말로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자들의 믿음은 더욱 대단한 믿음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오해한 잘못된 신념이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다. 그 분은 울고 아파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속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감사의 아이콘으로 삼는 욥 마저도 그에게 고통이 찾아온 그 순간에는 슬픔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드러냈다. 욥기 자체는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은 성경이며 하나님께서도 이 모든 불평을 다 받아주셨다.


이쯤 되니 저자에 대한 경외심마저 든다. 소설가 김홍신은 풀이 갓 베었을때 향기가 짙어지는 것처럼 사람은 상처가 있어야 향기가 짙어진다고 했는데, 저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지금 나에게는 아무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민망하다.

만약 지금 나의 아내가 쓰러져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그 분 앞에 반응할까. 은혜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이 새겨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것이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던가. 고통 가운데 있던 그렇지 않던, 아름다운 죽음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태도임을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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