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주의'에 대한 글목

다시, 프로테스탄트 / 양희송

2013.02.14 21:26





"이 책은 그동안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고 인정하며 임금놀이를 해왔다는 사실을 화들짝 일깨우고자 쓴책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방 안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난로에 이미 불이 꺼진 줄 모르셨습니까?" 라고 말하자는 것이다."(p14)


"개신교가 1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 층에서 이탈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이 세대에서 두드러지는 이슈에 대한 전향적인 대응에 실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중략)  아버지 학교의 대대적 확산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낙관할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 대학부, 청년부,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혁신적인 성공사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사교육과 입시에 전적으로 매여 있는 10대들에게 "대학 잘가라"고 기도회를 열어주는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구조에서 아이들이 놓여나도록 해주는 선제적 역할을 과감히 해내지 못하면, 자살과 왕따로 얼룩진 10대들과 그 부모들의 가슴속에 개신교는 부재한 것이다. 청년들의 삶을 옥죄는 현실적 고민을 단지 청춘의 가슴앓이로 간주하는 낭만적 태도는 그 세대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입증하는 것일뿐이다. 20대와 30대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없는 개신교는 이제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할수 없을 것이다."(p38)


"성장을 이루어 낸 목회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한 것으로 간주되고, 성도들의 삶에 대한 권위와 차별적 지위를 확보하게된다. '개신교 성직주의'는 그런 면에서 '개교회 성장주의'와 거의 필연적으로 만난다. 이 문제는 결국 교회는 무엇하는 곳이며,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교회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으로 간주하고,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한 우리는 이 질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교회론의 갱신 없이 목사론의 갱신이 없고, 그 양자의 갱신없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는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이 물의 정체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성장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아니다. 성장을 배타적으로 추구한 과정에서 개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버리고, 성도를 단지 숫자로 보게 하며, 집단의 한 구성요소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위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신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마을마다 십여명에서 많으면 삼사십명이 모이는 소규모 모임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초대형교회는 대량생산시대에 비로소 가능해진 모델이다.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을 추구하고, 관리능력을 증가시켜서 사람들을 통제 가능하게 파악하는 모델이다. 거기에는 '천하보다 더 소중한 한 생명' 같은 개념이 적용되기 어렵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양육프로그램과 제자훈련 과정이 쏟아내는 '제자'들에 환호하고, 자신들이 속한'공동체'가 너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찬양할 때에,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은 없는지 스스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p119)


"우리는 공룡이 됨으로써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피 터지는 생존경쟁을 당연시하지 말자. 되돌아보면, 우리가 생존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살아남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해 주던 생태계의 기반 위에서 영양을 공급받았고, 위로받았으며, 자극과 격려를 얻었다. 이겼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고, 언제나 오만하다. 그러나 우리를 지탱해준 생태계를 의식하는 이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성공에 기뻐하며, 남들의 모험을 지지해 줄것이다"(p195)






한국 개신교가 새로워지는 길은 스스로 종교개혁당시의 개신교 정신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책은 지금의 패왕적 권위를 지닌 목회자의 과잉대표성, 교계 중심의 패러다임을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이 그 길임을 이야기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주의, 성직주의, 승리주의는 교계 중심의 패러다임이 나은 오해의 산물이다.


책을 읽은 뒤, 지금은 위기가 아니라 매우 절박한 순간이다라는 느낌이 든다.


서울의 한 중대형교회에 속하는 나의 교회는 1만 성도의 비전을 교회의 비전으로 삼고 있다.

한쪽에서는 1만성도 파송운동(분당00교회)을 하는데, 한쪽에서는 1만 성도의 비전을 갖고 있다.

무엇이 부흥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이런 현실이 말해주듯이, 지금처럼 성장을 이뤄낸 목회자가 존재가치를 입증한 것으로 간주되는한 부흥이란 단어를 쓰더라도 교회의 성과를 수량으로 측정하는 지금의 상황은 회사경영과 다를게 없다. 요즘 기업도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경영을 말하지 않고 Spritual value를 추구하는데 하물며...

나의 교회도 크기만 작을뿐 동일한 욕망과 문제를 안고 있을뿐이다. 한쪽은 대형교회가 되어서 문제라면 다른 한쪽은 대형교회가 되지 못해서 문제인게 차이일뿐,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이제는 작은교회가 아름답다는 주장조차 조심스럽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의사에 절망적이지만 객관적인 진단에 환자가 저항하듯이,  우리는 늘상 이러한 일에 인간들이 왈가왈부하는것이 주제넘은 일이며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신다, 심지어 이런 현상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해서 막지 않으셨으니 결국은 허락하신 것 아니냐라는 반론에 부딪히는데, 이는 인간들의 잘못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비열한 자기변명일 뿐이다.


정말 개인의 죄에 관심을 갖는것이 복음주의자의 태도일까. 

이대로 연대책임을 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간다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인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또 다시 노력하고 개선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은 그럼 어떻게 말할수 있을까. 

회사야 무너지면 나라든 채권자든 회생시켜주지만, 교회가 무너지면 누가 회생시켜주나.


신앙이 세상과 만나는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겠다. 

직접적인 권력의 추구가 세상에 더 나은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난 5년의 역사가 말해주었다.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 내가 어떻게 제 2의 인생을 판에 박힌 삶을 살지 않고 살아가야할지 고민하고 "참여"해야 겠다. 지금 통과 하고 있는 이 막장같은 상황도 결국 종착지는 아닐테고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의 힘이 필요할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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